“엄마, 엄마는… 나를 믿나요?”

KBS에서 일할 때였다. 여의도 KBS는 오래된 건물인 본관과 나름대로 신축이라고 말하는 IBC 건물인 신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건물에 사무실, 회의실, 스튜디오, 미팅 룸 등이 분산되어 있어 연결 통로라고 하는 ‘구름다리’를 사이에 두고 이리 뛰고 저리 뛸 일이 많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녹화가 있던 날이었는데,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신관에서 본관으로 뛰던 중이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공중전화로 걸려온 전화, “여보세요…”라는 불안한 목소리.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아들이었다.

“엄마 많이 바쁘세요?”

늘 바쁜 엄마 때문에 너무 일찍 철이 든 아들은 미안하게도 엄마의 사정을 걱정했다.

“아니 안 바빠. 우리 아들 무슨 일이야?”

바쁘지 않다고 말했지만, 내 숨은 거칠었고 조급했다. 아들이 이 시간에 전화했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벽에 걸린 지난 방송 포스터를 초점 없는 눈으로 보며 물었다.

“엄마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얘기해 봐. 응?”

그러자 아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나를 믿나요?”

어떤 전조도 없이 훅 들어온 말에 갑자기 손이 떨렸다. 이유를 물어볼까 하다가 질문에 먼저 대답했다.

“응. 그럼. 엄마는 동하를 믿지.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아들을 믿지. 엄마는 한 번도 너를 믿지 않았던 적이 없어. 알았지?”
“네. 알았어요.”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늘 그랬고, 어제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래. 알았지?”
“네. 엄마만….”
“응… 뭐라고?”

아들은 잠깐 숨을 몰아쉬는 것 같더니 말했다.

“엄마… 엄마만, 나를 믿으면 돼요.”

아들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고 했고, 나는 겁이 났다.

“동하야. 무슨 일… 있어? 엄마가 지금 갈까?”
“아니에요, 엄마. 괜찮아요. 일하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아이처럼 눈물이 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구름다리 통로 사이에 주저앉아 버렸다.

오늘 나의 어린 천사에게 어떤 슬픈 일이 펼쳐졌던 걸까. 자신의 정의를 알리고 싶어 누군가와 싸웠을까.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그런 슬픈 상황에 놓였던 걸까. 아이의 그 힘든 순간을, 보호자인 내가 알지 못했다는 것이 미안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녹화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MC와 리딩도 해야 하는데. 순간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나의 모든 선택이 미안해졌고, ‘일하는 엄마’인 것이 불행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가끔 그날의 전화를 떠올리며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한다. 세상에 단 한 사람, ‘나를 믿는 사람’을 찾기 위해 쉬는 시간에 뛰어나와, 공중전화에 매달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을 어린 아들의 마음처럼. 우리는 그렇게 간절하게 ‘믿어주는 사람’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아무도 물어볼 사람이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슬픔일까.

(중략)

믿음이 우리를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경험한다. 학창 시절 숙제를 해놓고도 가져가지 않은 날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언제 가져가야 하는지 몰랐던 어리석은 나이였다. 숙제를 했다고 말했지만, 선생님은 믿지 않았고 그날 나는 매를 맞았다.

그때 알았다. 믿음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신뢰를 쌓는 일이란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를. 그런 경험들이 나를 어른으로 만드는 과정일 거라고 달래며 살아가지만, 나이가 들어도 믿음에 대한 지지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과 함께 내가 믿는 사람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새로운 아이템 회의를 하는 날이면 취재를 맡았던 막내 작가들의 표정에는 이런 목소리가 담겨 있다.

“정말 노력했다는 것을 믿어주세요.”

그 얼굴이 너무 천진하고 때론 지쳐 보여서 믿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걸 – 말하지 못할 때도 많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우리는 서로의 믿음에서 우리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여전히 나의 주변에는 ‘나를 믿나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부모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고, 이웃이며 동료다. 그들은 그렇게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그 눈을 보면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난 너를 믿어. 그리고 또 믿을 거야.”

(글 : 다큐 작가 정화영)
(결국엔, 어떤 위로)(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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