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시대가 도래한다

잡스와 워즈니악이 만든 첫 제품은 컴퓨터가 아닙니다. 불법 전화기였습니다. 1971년 가을, 스물한 살의 워즈니악이 에스콰이어지에서 기사 하나를 읽었습니다. 「비밀의 푸른 상자」. 전화 교환기의 신호음을 모방하면 전 세계 어디든 무료로 전화를 걸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워즈니악은 기사를 읽자마자 회로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이던 열여섯 살 잡스도 합류했습니다.

두 사람은 2,600헤르츠의 주파수를 만들어내는 장치를 제작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디지털 블루박스. 하지만 불법이었습니다. AT&T의 전화망을 해킹하는 장치였으니까요. 하지만 두 청년은 대당 150달러에 팔기 시작했고, 약 6,000달러를 벌었습니다.

한 번은 교황청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키신저 국무장관인 것처럼 목소리를 꾸미고 교황을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바티칸 관리들이 애들 장난인 것을 알아챌 때까지, 교황청을 비롯해 세상을 속이고 있었습니다.

잡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블루박스를 만들지 않았다면, 애플 컴퓨터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6,000달러 돈을 번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만들 수 있다’는 경험을 한 것이 핵심입니다. 잡지 기사 하나를 읽고, 회로를 설계하고, 장치를 조립하고, 작동을 확인하고, 사용자에게 전달했습니다. 구상에서 실행까지. 거대 기업의 인프라도, 전문 엔지니어의 팀도 없이 해낸 것입니다.

이처럼 만들어본 사람만이 더 큰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블루박스에서 애플I으로, 애플I에서 매킨토시로, 매킨토시에서 아이폰으로. 1971년에서 2007년까지, 36년간의 궤적을 관통하는 하나의 직선. 직선의 첫 점은 두 청년이 차고에서 납땜을 하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월트 디즈니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1918년, 열여섯 살의 디즈니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되지 않아 거절당했습니다. 출생증명서의 연도를 1901에서 1900으로 고치고 적십자 구급차 운전병으로 입대했습니다.

프랑스에 도착한 것은 1918년 11월. 종전 이후였습니다. 전투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디즈니는 구급차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군 신문에 만화를 기고했습니다. 동료 군인의 캐리커처를 그려주며 소정의 돈을 받기도 했습니다.

디즈니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애니메이션 회사를 차렸습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할리우드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디어 미키마우스가 태어났습니다.

만드는 경험은 인생을 바꿉니다. 잡스와 디즈니, 이들은 누군가로부터 허락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건이 갖춰지길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블루박스를 만드는 데 있어서 워즈니악의 지식은 절대적이었습니다. 회로 설계, 부품 조달, 주파수 조정 등은 전문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1972년에는 ‘만드는 자’가 되려면 기술력을 갖고 있어야 했습니다. 소수의 기술 천재에게만 허용된 지위였습니다.

2026년은 다릅니다. 만드는 데 워즈니악 같은 존재가 없어도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컴퓨터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고, 개발 기획서를 한국어로 쓰면, AI가 이를 코드로 만들어줄 정도가 되었습니다.

GitHub Copilot이라는 AI 코딩 도구의 숫자를 보면 더 놀랍습니다. 2025년 기준 누적 사용자 2,000만 명. 포춘 100대 기업의 90%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현재 전 세계 코드의 46%를 AI가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그런 시대가 와버렸습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모두를 사진가로 만들었듯, AI는 모두를 개발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코드를 한 줄 한 줄 작성하는 작업은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의 구조를 이해하고, 데이터를 설계하고, 사용자 경험을 고민하는 일은 더 많은 사람에게 필요해졌습니다.

인스타그램 시대에 구도와 조명에 대한 이해가 더 많은 사람에게 가치 있어진 것처럼. 코드를 직접 쓰는 사람은 줄겠지만,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이 시대의 기본 소양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합니다. 같은 AI를 사용하더라도 기본 소양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간격. 우리 회사 디자이너가 저보다 AI로 그림을 더 잘 그리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림을 볼 줄 알기 때문입니다. AI가 아무리 똑똑해도, 지시하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면 그저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언어를 알아야 개념이 있고, 개념이 있어야 일을 제대로 시킬 수 있습니다. 만드는 도구가 민주화된 시대에,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앞서 기획자의 시대가 도래할 거라고 애기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도메인 전문성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글 출처:: David Song AI 시대의 교육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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