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듭 강조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계산하는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감각에 있고, 영감에 있고, 정서에 있습니다. 정서는 단지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정서에는 분명한 인식론적 차원입니다. 인지하고, 분별하고, 그 가치를 알아보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정서란 눈먼 감정이 아닙니다. 차이를 인식하는 눈과 그 차이에 기울어지는 마음이 함께 작동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학습이 ‘차이를 만드는 차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룡이라는 존재에 매료된 아이에게 공룡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공룡의 거대한 뼈를 보는 순간 경이로움이 일어납니다. 이 경이로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아이는 공룡과 다른 동물의 차이를 인식했습니다. 뼈의 크기, 이빨의 형태, 멸종이라는 사건. 차이를 인식하는 눈이 열리자 거기에 매혹되어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이처럼 인식과 정서가 동시에 작동할 때, 경이로움은 질문이 됩니다. 질문은 탐구가 되고, 탐구는 지식이 됩니다.
차이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차이에 기울어지는 아이만이 이 순환을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AI 시대 교육의 핵심입니다. 차이 앞에서 질문이 생기고, 그 질문 속에 자신의 의지가 기울어지는 방향을 자각하는 아이. 그 아이만이 AI를 도구로 쓸 수 있습니다.
AI는 어마어마한 지능을 가진 존재입니다. 모든 분야의 지식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 그 어떤 인간 전문가보다 빠르게 연결하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그 지능에 방향을 주는 것은 인간입니다. 내가 진정 추구하고 싶은 것, 정말 좋아하는 것, 깊이 알고 싶은 것, 이것들이 나의 정서 속에서 발견되고 자각되지 않으면, AI를 제대로 쓸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의 언어를 빌리면, 의지의 성향이 없는 사람은 AI 앞에서 수동적이 됩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릅니다.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AI가 내놓는 답을 그대로 복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자신의 정서를 아는 사람, 무엇에 가슴이 뛰는지, 무엇을 향해 기울어지는지를 자각하는 사람은 AI를 능동적으로 부립니다.
비전과 미션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무언가를 꼭 이루어내야겠다는 목표, 무언가를 반드시 성취해야겠다는 열망. 이것은 기계적인 것이 아닙니다. 비전과 미션은 인간의 정서에서 태어납니다. 어떤 문제를 보고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섭니다. 어떤 아름다움에 매혹된 사람이 그것을 혼자서만 보지 않고 세상에 보여주려 합니다. 어떤 고통에 눈물을 흘린 사람만이 세상에서 이를 없애기 위해 자신을 바칩니다. 정서가 의지의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이 비전이 되고, 비전이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WMS에서 한 학생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앱을 만든적이 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AI가 대부분 도와주었습니다. 코드의 상당 부분을 AI가 작성했고, 디버깅도 AI가 보조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AI가 아니었습니다. 그 학생이 시각장애인 이웃을 만나면서 느낀 안타까움. 그 안타까움이 “내가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되었고, 질문이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완성된 앱을 시각장애인에게 보여주던 날, “내가 만든 것으로 누군가가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는 데서 오는 전율. 이것은 AI가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정서가 방향을 정했고, AI가 실행을 도왔고, 그 결과가 다시 더 깊은 정서를 낳았습니다. 그 경험 이후 이 학생의 공부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까지 코딩을 했습니다.
정서가 질문을 낳고, 질문이 탐구를 낳고, 탐구가 또 다른 정서를 낳는 순환. 이것이 살아 있는 교육입니다. 죽은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고 시험으로 측정합니다. 살아 있는 교육은 정서를 깨우고 그 정서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지켜봅니다.
- 출처: David Song :: AI시대 교육의 역할